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복궁 광화문 (문단 편집) === 1920년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k-heritage.tv/0817_spe_img210.jpg|width=100%]]}}} || |||| {{{#gold '''[[경복궁 건춘문|{{{#gold '''건춘문'''}}}]] 북측(현 국립 민속 박물관)으로 옮겨진 광화문(1927년경)'''}}} ||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경복궁 앞뜰을 파괴해 [[조선총독부 청사|조선총독부 신청사]]를 지었고, 이 때 광화문도 조선총독부 건물을 가로막고 있어 헐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조선인은 물론 일부 일본인들조차 반발할 정도라서(특히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 일본의 민예 연구가, 미술 평론가로 한국 민속 예술이나 미술 쪽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져 일본인임에도 조선에 대한 미술 서적을 발간했다. 연구에 대한 깊이나 정도가 훌륭해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인물 연구 서적, 그의 연구에 대한 평론, 연구 서적 등이 현재에도 나올 정도다(다만 그의 주장 중 하나인 '조선의 예술은 억압과 탄압에서 비롯돼서 그에 따른 '한(恨)' 모티브가 존재한다.'란 부분만큼은 여러 학자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그의 광화문 철거 반대는 동정표도 섞여있을지는 모르나 워낙 그 당시로서나 지금으로서나 꽤나 민예, 미술계에서의 그의 평가가 대단했고 그 당시 입지 역시 상당한 것으로(그러니 파문이 일었겠지만) 민예, 미술 연구가로서도 광화문만한 연구 소재가 사라지는 것 역시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런 상황을 알든 모르든 언론이나 민중(일본이든 조선이든)이 당시 상황(일제 강점기 상황)에서 그가 발언한 광화문 철거 반대는 크나큰 떡밥이었으리라. 덧붙여 한자로 쓴 이름이 유종열(柳宗悅) 로 조선 이름처럼 들리는 이름이라 당시 조선 총독부에서 웬 조선인이 헛소리를 한다, 혹은 그 새끼 실은 조선놈 아니냐, 하고 대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가 철거를 반대하여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광화문은 일단 무사히 살아남았다. 이에 대해 《[[http://www.supil.com/essaylove/essay100/supil52.htm|헐려 짓는 광화문]]》이라는 수필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대로 두면 [[조선총독부]]를 가로막기 때문에 때문에 원래 자리에서 벗어난 [[경복궁 건춘문|건춘문]] 북쪽으로 해체 이전해버렸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원래 광화문과 다르게 5도 가량 동쪽을 바라보도록 각도를 틀어 남산의 [[조선신궁]] 쪽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